·제   목 : [중앙일보]20년만에 실현된 ‘박생광’의 꿈 (2003-07-15 게시물)
·작성자 : 이영미술관 ·작성일 : 2006-11-24 ·조회 : 1881
※첨부파일 :
20년만에 실현된 ‘박생광’의 꿈

38년 만에 바르셀로나를 찾아온 무더위는 한낮의 기온이 39도를 오르내렸다. 계속되는 이상기온
속에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 바르셀로나 국제정보센터 주최로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한-EU 국제학술회의는 세계 속의 경기도에 걸맞은 위상을
세우며 문화협력을 통한 문화증진과 경제협력 활성화를 위한 행사로 개최됐다.
특히 경기도와 한국에 대한 문화적 이해를 통한 다각적인 협력의
발판마련을 위한 ‘경기도 문화주간’ 행사와 맞물려 더 한층 의미 있는 행사로 치러졌다. 독일에서의 한차례 연주회와 스페인에서의 두 차례 연주를
통해 국악의 멋과 맛을 한껏 선보인 경기도립국악단의 연주는 기립박수 세례를 받았고, 한국 역사 사진전도 유럽인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한국 혼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박생광의 작품전시회는 단연 돋보였다. 이영미술관 김이환 관장은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박생광의 작품 9점을
가져가 전시회를 열었다. 크기도 100호 이상의 대작들이다. 스페인의 그림애호가들을 위해 경기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22점의 작품이 실린 도록을
새로 제작하는 등 박생광의 작품을 통해 한국의 현대미술세계를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예상치 못했던 무더위에 당황한 이는 바로 김
관장이었다. 여름이라고 해도 그다지 덥지 않았었기에 냉방시설이 미비한 현실에서 전시 장소인 성 어거스티 성당은 찜통을 방불케 했다. 금방이라도
그림의 물감이 묻어 나거나 녹아버릴 지경이었다. 김 관장은 서둘러 스페인 현지에 있는 삼성공장에 연락을 취했고 에어컨을 설치하는 등으로 작품
보호에 안간힘을 쏟았다.
김 관장과 박생광 간의 인연은 2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생광의 삶은 전적으로 그림에 바쳐졌지만
1977년 73세의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서울의 진 갤러리에서 첫번째 개인전을 연다. 뒤이어 1981년 백상기념관에서 두 번째 전시회와 타계
1년 전인 1984년 한국예술문화진흥원에서 마지막 개인전을 연다.
김 관장은 1977년 첫 전시회를 관람한 후 수유리에 있는 박생광의
집을 방문한다. 흑모란 그림 한 점을 사기 위해서다. 70대 노화백과 40대 그림애호가와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후 화가는 ‘아들’을 얻게
됐고 아들은 그를 경제적 어려움에서 해방시켜 주는 동시에 전시회를 주선했다.
박생광의 그림세계는 1981년부터 5년간 꽃을 피웠다.
생생한 한국의 이미지와 전통적인 한국 색이라고 불리는 붉은색과 검은색, 흰색, 청색, 황색을 선명하게 표현하여 한국현대회화 사상에 새로운 기원을
이룬 것이다.
특별히 주목받은 작품은 스페인의 입체파 화가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연상시키는 작품 ‘명성황후’였다. ‘게르니카’는
1937년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의 작은 마을 게르니카가 독일 나치에 의해 무참히 짓밟힌 모습을 담았고, ‘명성황후’는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그 시신을 불태운 비극적인 역사를 표현하고 있다.
박생광은 그림을 완성하고 나서 “이 그림이야말로 한국의 게르니카이다. 언제
때가 되면 피카소의 고향 스페인에서 내 그림을 꼭 선보이고 싶다”고 말했다. 그 현장에는 김 관장이 있었고, 20년의 세월이 흘러 노화백의
희망이 이루어졌다.
김 관장은 전시 개막을 앞두고 ‘명성황후’가 스페인인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설 지를 생각하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김 관장의 궁금증은 개막식에 참석한 유럽인들의 한결같은 감탄사와 가우디 성당 조각가인 수비라치가 작품에 관련된 설명을 듣기도 전에
“명성황후를 보는 순간 게르니카가 떠올랐고 박생광의 작품 속에는 한국적 상징들이 너무도 강하게 살아있다”는 말에서 쉽게 풀려나갔다.


박정임/문화부장